역사 속 인물





석씨(石氏)의 시조인 석린(石鄰)은 '경인보(庚寅譜)'에 의하면, 중국에서 고려에 귀화하여 의종 24년(1170)에 이의방(李義方)을 따라 서경(西京) 지금의 청주(淸州)에서 무신란(武臣亂)에 참여하여 낭장(郎將)이 되었고, 명종 7년에는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서북면병마사(胥ㅑ面兵馬使)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에 올랐고, 예성군(蘂城君)

에 봉함을 받았다한다. 석정(石靖)은 숭록대부(崇祿大夫)•행밀직제학(行密直提學)의 관직에, 석달은 자헌대부(資憲大夫)•행밀직제학(行密直提學)의 관직에, 석흥국(石興國)은 가선대부(嘉善大夫)•행문하시중(行門下侍中)의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숭록대부(崇祿大夫)는 충렬왕 24년(1198) 관계(官階) 개정으로 생긴 종(從)1품(品) 위계(位階)이다. 부(父)인 석린(石린)이 죽은 것이 1187년의 일이므로 석정(石靖)이 생존했어야 할 기간이 110년 이상이어야 한다. 자헌대부(資憲大夫), 가선대부(嘉善大夫)는 조선조의 관계(官階)이다. 석양선(石良善)이 아자춘(李子春) 조선 환조(桓祖)와 동서간으므로, 그에서 소급해보면 석달과 석흥국(石興國)이

활동했던 시기는 13세기에 해당해야 한다. 13세기에 생존했던 인물에 조선조의 관계(官階)가 주어졌다는 기록에는 의문이 있다. 5세조인 석도(石道)는 판결사(判決事) 겸(兼) 쌍성총관(雙城摠管)을 지냈다고 한다. 쌍성(雙城)은 고려시대의 동북면(東北面)지방에 설치되었던 원(元)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말한다. 그의 아들인 양선(良善)은 최한기(崔閑奇)의 사위였다. 최한기(崔閑奇)는 이성계가(李成桂家)의 세계(世系)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서 살펴보면, 당시 쌍성천호(雙城千戶)로서 쌍성(雙城)지방의 세력가였다. 그렇다면 석도(石道)와 석양선(石良善)대에 걸쳐서 석씨가(石氏家)는 고려가 아닌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 거주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원(元)이 고려를 침입하고 있을 때, 원군(元軍)의 동북면(東北面)점령과 고려인의 반란에 의해 설치된 원(元)의 관부(官府)였다. 이성계가(李成桂家)의 선조(先祖)도 전주에서 이곳으로 유리해간 집단임은 잘 알려져 있다. 아마도 석정(石靖) 이후 석흥국(石興國)대에 걸친 어느 시기에 석씨가(石氏家)도 쌍성(雙城)지방으로 유리해간 듯하다. 석도(石道)의 관직이었던 쌍성총관(雙城摠管)은 총관부(摠管府)가 고려에 수복될 때까지 조휘가(趙暉家)의 세업(世業)이었다. 석씨가(石氏家)에서 총관직(摠管職)에 나아갈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석양선(石良善)은 조선 개국 후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봉해진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이성삼촌(異姓三寸)이다. 이성계(李成桂)의 모(母) 의혜왕후(懿惠王后) 가 출산 후 곧 죽었으므로 이성계(李成桂)는 이모손에서 키워졌다. 그래서 즉위후에 이모를 경창옹주(慶昌翁主)에, 이모부를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봉했을 뿐 아니라, 외조부인 최한기(崔閑奇)는 정효공(靖孝公)으로 봉했다. 정효공(靖孝公)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교(敎)를 내려서 외손(外孫)인 석천을(石天乙)이 봉사(奉祀)하게 했다. 그런데 석천을(石天乙)이 독자여서 양가(兩家)의 봉사(奉祀)를 할 수 없으므로 다시 교(敎)를 내려 옹주묘(翁主墓)의 봉사(奉祀)를 역시 외손(外孫)인 안령(安齡)이 하게 하였다. 석씨(石氏)는 석양선(石陽善)대의 공으로 하여 조선 개국 후 현달하게 되지만, 자손 중에는 고려조에 수절하여 속세를 떠난 자도 있었다. 석천을(石天乙)은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고 석수명(石壽明)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석여명(石汝明)은 태종이 한성윤(漢城尹)•집현정제학(集賢殿提學)에 임명하였으나, 조선의 녹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응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이 충주(忠州) 수의산(守義山) 회문동(回文洞)에 안치하니, 이 후손이 충주(忠州) 석씨(石氏)를 칭하여 잉관(仍貫)하게 되었다. 석여명(石汝明)은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이르렀다. 충주(忠州)에 안치된 후 당시에 호은 정몽주, 목은 이색에 비해서 부끄럽지 않다는 평을 들었다 한다. 죽은 후 태종이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였다.

석균(石筠)은 진용교위(進勇校尉)•의흥위부사(義興衛府使)를 지냈고 석관(石瓘)은 태천군수(泰川郡守)를 지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석문수(石文守)는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냈고, 동생인 석문현(石文賢)은 이천현감(利川縣監), 석문성(石文成)은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석감(石監)은 정주목사(定州牧使)를 지냈고 석귀수(石龜壽)는 삼척현령(三陟縣令)을 지냈다. 석정신(石貞信)을 정랑(正郞)에 올랐고, 그 아들인 석성옥(石成玉)은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 석문성(石文成)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다. 모정공(茅亭公) 석인정(石仁正)은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고 예원군(蘂原君)에 봉해졌는데, 순안에 창읍실적비(創邑實績碑)와 신도비(神道碑), 용암사(龍岩祠)가 있다. 석의정(石義正)은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냈으며 석예정(石禮正)은 정산현감(定山縣監), 석지정(石智正)은 승지(承旨), 석신정(石信正)은 한림(翰林)을 지냈다. 이들 형제는 각각 분파의 파조(派祖)가 된다.

석사진(石斯珍)은 세종조에 등과하여 단종 2년 행경상우병마절도사(行慶尙右兵馬節度使) 겸(兼)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에 올랐다. 세조가 즉위하자 의령에 퇴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석사감(石斯감)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석사화(石斯화)는 방어사(防禦使)를 지냈다. 석옥점(石玉점)은 병조좌랑(兵曹佐郞) 겸(兼) 훈련원선전관(訓練院宣傳官)을 지냈다. 석규(石奎)는 문과를 거쳐 전적(典籍),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냈고, 석조(石趙)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 석광보(石光輔)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석천근(石千斤)은 선조 임진왜란 때 원종(元宗)1등공신에 봉해졌고, 석말립(石末立)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에 올랐는데 행도호부사(行都護府使)의 관직을 역임했다.

석성옥(石成玉)과 석득수(石得守)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무과에 급제한 석충남(石忠男)은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석지형(石之珩)은 인조 1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후 형조정랑(刑曹正郞)•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다. 강화부교수(江禍ㄴ敎授), 개성부교수(開城府敎授)를 지냈으며, '남한일기(南漢日記)'를 지었고 현종조에 '오위귀감(五位龜鑑)'을 편찬하여 왕(王)에게 바쳤다. 석종(石琮)은 선조조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성주에 은거하였다.

석매성(石邁省)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고, 석계흥(石繼興)은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냈다. 석재사(石載士), 석동현(石東顯), 석우주(石宇柱)는 모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석부창(石富昌)은 행한성좌윤(行漢城左尹)•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의 벼슬에 올랐다. 무과를 거쳐 관직에 나아간 석만수(石萬壽)는 만호(萬戶),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석지암(石之巖)도 무과(武科)를 거쳤는데, 선전관옥강만호(宣傳官玉江萬戶)를 거쳐 훈련주부(訓練主簿), 어모장군(禦侮將軍), 개천군수(价川郡守)를 역임하였다. 석백(石栢)은 선조 임진왜란 때 공신이며 임란공신유사지 및 창녕군지의사 및 충신편에 기록되어있다.

석기곤(石基坤)은 문과에 급제한 후 행경상도사(行慶尙都事), 병조좌랑(兵曹佐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다. 석치경(石致敬)은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고, 석성진(石成瑨)은 절충장군(折衝將軍)의 당상관(堂上官)에 올라 행서북진무(行胥ㅑ鎭撫) 겸(兼) 절제사(節制使)를 지냈다. 석봉손(石奉孫)은 사간원교수(司諫院敎授) 겸(兼) 우승지(右承旨)를 지냈고, 석재주(石載柱)는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석성국(石成國)과 석창문(石昌文)은 구한말에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석성국(石成國)은 1895년 을미사변 후 한봉수(韓鳳洙)와 함께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뒤에 체포되자 자결하였다. 석창문(石昌文)은 일찍이 의병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1907년 정미년(丁未年)에 고종황제의 양위와 군대해산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속리산에서 선봉으로 싸웠다. 다음 해 군무(軍務)로 오대산에 가다가 일본군에 포위되었으나 격전 끝에 사로잡혀 스스로 혀를 끊어 순국했다. 석성기(石盛基)는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때 경성의학 전문학생으로 탑골공원 독립선언식에 참가하고 고향 인상주에 내려와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 후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하고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출감 후 작고하였다.


역대 주요 인물

▲ 고려조
석 정(石 靖) 밀직제학(密直提學) 석 달 밀직제학(密直提學) 석흥국(石興國) 문하시중(門下侍中) 석 도(石 道) 쌍성총관(雙城摠管) ▲ 조선조
석양선(石良善)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 석천을(石天乙) 중랑장(中郞將) 석수명(石壽明) 한성판윤(漢城判尹) 석여명(石汝明) 한성윤(漢城尹) 석 균(石 筠) 용교위의흥위부사(勇校尉義興衛府事) 석 권(石 權) 태천군수(泰川郡守) 석문수(石文守) 예조참판(禮曹參判) 석문현(石文賢) 이천현감(利川縣監) 석문성(石文成) 예성군(蘂城君)ㆍ직제학(直提學) 석정감(石正監) 정주목사(定州牧使) 석귀수(石龜壽) 삼척현감(三陟縣監) 석정신(石貞信) 정랑(正郞) 석인정(石仁正) 예원군(蘂原君)ㆍ호조판서(戶曹判書) 석의정(石義正) 예조참의(禮曹參議) 석예정(石禮正) 정산현감(定山縣監) 석지정(石智正) 승지(承旨) 석신정(石信正) 한림(翰林) 석실언(石實彦) 사재감정(司宰監正) 석성옥(石成玉) 이조참의(吏曹參議) 석 거(石 琚) 이조참의(吏曹參議) 석사진(石斯珍)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석사성(石斯珹) 통덕랑(通德郞) 석사화(石斯화) 방어사(防禦使) 석옥점(石玉점) 병조좌랑(兵曹佐郞) 석옥진(石玉진)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 석옥련(石玉連)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석형손(石衡孫)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석태산(石泰山) 태일전참봉(泰一殿參奉) 석광필(石光弼) 어모장군의흥위좝주부사과(禦侮將軍義興衛左部副司果) 석유규(石有珪) 참의(參議) 석유벽(石有璧) 좌랑(佐郞) 석 간(石 赶) 통사랑(通仕郞) 석 총(石 摠) 시랑(侍郞) 석 규(石 奎) 전적(典籍) 석 흘(石 屹) 절충장군부사직(折衝將軍副司直) 석 조(石 趙)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석광보(石光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석 련(石 璉) 건공장군(建功將軍) 석경일(石擎日) 전적(典籍) 석윤감(石潤감) 안음현감(安陰縣監) 석언걸(石彦傑) 어모장군(禦侮將軍) 석 홍(石 弘) 절충장군(折衝將軍) 석말립(石末立) 도호부사(都護府使) 석응벽(石應璧) 교관(敎官) 석자헌(石自헌)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석응룡(石應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석성옥(石成玉)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석광수(石光壽)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석희준(石稀俊)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석여옥(石汝玉) 공조좌랑(工曹佐郞) 석득수(石得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석 잠(石 岑) 광량첨절제사(廣梁僉節制使) 석 선(石 宣)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석건축(石乾軸)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 석응길(石應吉)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석을형(石乙珩) 형조정랑(刑曹正郞) 석대길(石大吉) 형조정랑(刑曹正郞) 석윤민(石潤珉) 절충장군(折衝將軍) 석 린(石 鄰) 좌찬성(左贊成) 석대현(石大賢) 군자감정(軍資監正) 석민서(石民瑞) 문화현감(文化縣監) 석천수(石天壽)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석 종(石 琮) 병조좌랑(兵曹佐郞) 석매성(石邁省)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석계흥(石繼興)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석취하(石就夏) 군자감정(軍資監正) 석운한(石雲漢)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석재사(石載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석동현(石東顯)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석우주(石宇柱)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석중원(石仲元) 부승지(副承旨) 석부창(石富昌) 한성좌윤(漢城左尹) 석대택(石大宅) 태천현감(泰川縣監) 석종헌(石宗憲) 춘추관교서랑(春秋館校書郞) 석주천(石柱天) 사복시정(司僕寺正) 석원덕(石元德) 공조참의(工曹參議) 석대관(石大寬) 절충장군부호군(折衝將軍副護軍) 석예창(石禮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석일삼(石日三) 선전관(宣傳官) 석만수(石萬壽)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석지암(石之巖) 개천군수(价川郡守) 석종규(石鍾圭)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석중립(石仲立) 병조참의(兵曹參議) 석명국(石命國) 중추부사(中樞府事) 석홍주(石鴻柱)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석기곤(石基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석재수(石載秀)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석익손(石益孫)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석준옥(石俊玉)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석대재(石大載)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석진태(石鎭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석치경(石致敬) 호조참판(戶曹參判) 석성진(石成瑨) 절제사(節制使) 석최중(石最重) 절충장군(折衝將軍) 석지황(石之璜) 절충장군(折衝將軍) 석충남(石忠男) 절충장군(折衝將軍) 석명준(石明俊) 고진첨절제사(古鎭僉節制使) 석봉름(石峰廩)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석종덕(石鍾德)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석 순(石 洵) 궁내부참서(宮內府參書) 석태손(石泰孫) 우승지(右承旨) 석재주(石載柱)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석영호(石永昊) 삼천포권관(三千浦權官) 석성구(石成國) 의병장(義兵將) 석창문(石昌文) 독립투사(獨立鬪士)